저서

서울 G20 정상회의와 스마트 TV

김려성 2010. 12. 22. 15:07

유비쿼터스(Ubiquitous) 환경

 

서울 G20 정상회의와 스마트 TV

 

소프트 꼬레아 저자 김 려 성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 (Hirohito / 裕仁)가 라디오를 통해 대동아 전쟁 종결의 조서를 방송하였다.(註: 항복 공표). “짐은 깊이 세계의 대세와 제국의 현상에 감안하여 비상조치로써 시국을 수습코자 여기 충량(忠良)한 그대 신민(臣民)에게 고하노라. 짐은 제국 정부로부터 하여금 미, 영, 중, 소, 4국에 대하여 그 공동선언을 수락할 뜻을 통고케 하였다. -- (中略) -- 일왕(日王) 서명, 소화(昭和) 20년 8월 14일에 녹음하여 8월15일 정오에 라디오를 통해 녹음방송을 실시하였다. 2010 G20 서울 정상회의에 즈음하여 우리나라와 관계가 깊은 세계 각국 정상들의 움직임과 뉴 미디어의 발전을 되새겨보자.

 

국권을 늑탈 당하다.

1910년의 일제의 강제 침략으로 국권을 잃게 되었다. 개항 초기 조선을 둘러싼 청나라와 각축전을 벌이던 일제는 1894년 청일전쟁을 일으켜 승리하였다. 이에 일제는 조선에서 우월한 지위를 확보할 수 있었으며, 아울러 일제는 러일전쟁과 동시에 1904년 2월 대한제국에 군대를 파견하였다. 이러한 군사력에 기초해서 대한제국 정부를 위협하여 ‘한일의정서(韓日議政書)’를 체결하였다. 이로써 대한제국은 일제에게 군사적 목적을 포함한 모든 편의를 제공하였으며, 많은 토지와 인력까지 징발 당하였다.

 

을사조약 늑결(勒結)

대한제국 식민지화의 국제적 승인까지 얻은 상황에서 일제는 1905년 11월 고종을 협박하고 매국관리들을 매수하여 을사조약(제2차 한일협약)을 늑결(勒結)하였다. 이 조약으로 대한제국은 국권을 강탈당한 채 형식적인 국명만을 가진 나라로 전락하였다. 고종은 을사조약의 무효를 선언하고 대한제국의 주권수호를 호소하기 위해 1907년 6월 헤이그 평화회의에 특사를 파견하였다. 그러나 일제는 이를 빌미로 고종을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시켰다.

 

헤이그 평화회의에 밀사(密使)를 파견

러시아 황제 니콜라이 2세의 제창으로 세계 평화를 도모하기 위하여 네덜란드 헤이그에 개최된 국제회의이다. 이 만국평화 제2차 회의 때 한국 고종의 밀령(密令)으로 이상설(李相卨), 이위종(李瑋鍾), 이준(李儁)이 파견되어, 한국에 대한 일본의 부당한 간섭을 호소하고 한국이 회의 참가에 대한 통보를 받지 못한 것을 항의하는 밀서(密書)를 전달하고, 을사조약(乙巳條約)이 한국 황제의 뜻이 아니고 일본의 강압에 의한 것임을 폭로하여 파기시키려 하였으나 일본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실패하였으며, 그 곳에서 이준은 분사(憤死)하고 말았다.

 

합병조약을 체결

1910년 8월 16일 비밀리에 조선 총리대신 이완용에게 합병조약안을 제시하고 수락할 것을 독촉하였으며, 같은 달 22일 이완용과 데라우치 마사타케 사이에 합병조약이 조인되었다. 일제는 우리 민족의 저항을 두려워하여 조약체결을 숨긴 채 정치단체의 집회를 철저히 금지하고, 또 원로대신들을 연금한 뒤인 8월 29일에야 순종으로 하여금 양국(讓國)의 조칙을 내리도록 하였다. 이 조약에서 "한국 황제 폐하는 한국 전체에 관한 일체 통치권을 완전히 또 영구히 일본 황제 폐하에게 넘겨 준다"고 규정하고 있다. 이로써 519년을 이어온 조선은 국권을 완전히 상실하고 우리민족은 일제의 식민 통치를 받게 되었다.

 

순종(純宗)이 아침마다 곡을 하다

1919년 1월 21일 고종이 68세로 승하하여 명성황후 민비와 함께 국장으로 홍릉에 모셔졌다. 고종이 승하하자 순종이 기거하던 창덕궁과 고종이 묻힌 홍릉(구리 금곡리) 사이에 덕률풍(德律風 Telephone)이 개설됐다. 고종의 3년상을 순종이 치르기 위해서였다. 순종은 아침마다 덕률풍 앞에서 곡을 하는 동안 홍릉의 능지기는 수화기를 봉분 앞에 갖다 대고 있었다. 요즘 식으로 말하자면 화상전화로 성묘를 대신하고 인터넷으로 차례를 모신 격이다.

 

덕률풍(德律風 Telephone)으로 생명을 얻다

덕률풍으로 덕을 본 사람이 있다. 그가 바로 백범 김구선생이다. 명성황후 시해에 분노한 당시 21세 청년 백범은 일본군 장교를 타살(打殺)한 혐의로 사형을 선고 받고 인천 감옥에 갇혔다. 우연히 이 사실을 알게 된 고종은 사형집행 직전에 인천 감리소로 전화를 걸어 감형을 지시했다. 인천 감리소에 전화가 가설된 뒤 사흘 후의 일이었으니, 혹시 전화 개통이 조금만 늦었더라도 백범은 이미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을지 모른다. 새로운 미디어 도입 초기 덕률풍(Telephone)은 민족의 지도자를 살리기도 했다.

 

카이로 회담 (Cairo Conference)

2차 세계대전 때 이집트의 카이로에서 개최된 회담으로 1943년 11월 22일에서 26일까지 미국 루스벨트(Roosevelt) 대통령, 영국 처칠(Churchill) 수상, 중화민국 장제스(蔣介石) 총통의 세 연합국 수뇌가 이집트의 수도 카이로에서 세계전쟁에 대한 대응 문제로 모임을 가졌다. 당시 가장 중요한 핵심 사안으로 대일전(對日戰)에 서로 협력할 것을 협의하였고, 일본이 패전했을 경우를 가정하여 일본의 영토 처리에 대하여 연합국의 기본방침을 결정하였다. 이러한 방침은 <카이로선언>으로 발표되었다. 군사문제에 있어서는 처칠과 루스벨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에 대해서 숙의하였고, 장제스와 함께 1914년 이래 일본이 점령한 모든 영토를 탈환한다고 합의하였다.

 

한국민에게 자유와 독립을 주자

카이로 회담 결과 발표한 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은 3국이 일본에 대한 장래의 군사행동을 협정하였으며, 야만적인 일본에 가차없는 압력을 가할 것을 결의하였다. 일본의 침략을 저지, 응징하나 모두 영토확장의 의사는 없으나 1차 세계대전 후 일본이 탈취한 태평양 여러 섬을 박탈하고, 또한 만주, 타이완, 펑후제도 등을 중화민국에 반환하고, 일본이 약취한 모든 지역에서 일본세력을 축출한다. 특별조항으로 한국의 미래에 대하여 언급하고 독립을 보장하는 국제적 합의를 하였다. “현재 한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적절한 절차에 따라 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줄 것이다.”

 

얄타회담 (Yalta Conference)

2차 세계대전 종반 1945년 2월 4일에서 11일에 소련 흑해 연안 우크라이나 얄타에서 미국, 영국, 소련의 수뇌들이 모여 독일의 패전과 그 관리에 대하여 열린 회담이다. 미국의 루스벨트 대통령, 영국의 처칠 수상, 소련의 스탈린 최고인민위원 등 연합국의 지도자들은 패전 후 독일을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국이 분할 점령한다는 원칙을 세우고, 연합국은 독일인에 대해 최저 생계를 마련해주는 것 외에는 일체의 의무를 지지 않는다는 데 합의하였다. 얄타회담의 일부 조항은 태평양과 만주에서 일본을 패배시키는 데 소련의 지원이 절실히 필요하다는 가정에서 체결된 것이었다. 그러나 소련의 참전은 지연되었고, 미국의 원폭이 투하(1945. 8. 6)된 뒤에 참전하여(8. 8), 참전한 지 불과 5일 만에 일본은 항복하였다. 소련은 별 다른 희생없이 승전국이 되었다.

 

포츠담선언 (Potsdam Declaration)

2차 세계대전 종전 직전인 1945년 7월 26일 독일의 포츠담에서 열린 미국, 영국, 중국 3개국 수뇌회담의 결과로 발표된 공동선언이다. 일본에 대해서 항복을 권고하고 제2차 세계대전 후의 대일처리방침을 표명한 것이다. 처음에는 미국 대통령 트루먼, 영국 총리 처칠, 중국 총통 장제스(蔣介石)가 회담에 참가하였으나, 얄타회담 때의 약속에 따라 소련이 대일선전포고를 하게 되어 소련공산당 서기장 스탈린도 8월에 회담에 참가하고 이 선언문에 함께 서명하였다.

이 선언은 “카이로선언의 모든 조항은 이행되어야 하며, 일본의 주권은 연합국이 결정하는 4개의 섬으로 국한될 것이다”라고 명시하여 카이로선언에서 결정한 한국의 독립을 확인하였다. 그러나 일본이 이 선언을 거부하였기 때문에 히로시마(廣島)와 나가사키(長崎)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고, 8월 10일 일본은 이 선언을 수락하게 되었다. 8월 14일 제2차 세계대전은 완전히 끝났다. 그래서 1945년 8월 15일 정오, 일본의 천황 히로히토가 라디오를 통해 대동아 전쟁 종결의 조서를 녹음 방송하였다. (註: 항복 공표)

 

AP 와 UPI 통신

지리적으로 교통과 통신에 제약이 많았던 19세기에는 뉴스를 전달하는 통신사의 역할이 지대하였다. 지금의 인터넷 역할을 하였다. AP (Associated Press) 통신은 UPI(United Press International)와 함께 세계 최대의 통신사이다. 1848년 뉴욕의 6개 신문사가 당시 상업신문 기자였던 데이비드 헤일(David Hale)의 제안에 따라 결성되었다. 기원은 하버뉴스어소시에이션(Harbor News Association)으로, 항구에 입항하는 선박으로부터 유럽의 뉴스를 공동으로 취재하기 위하여 만들었다. 1863년 당시 미국 대통령 링컨(Abraham Lincoln)의 역사적인 명연설인 게티즈버그연설(Gettysburg Address)을 보도했고, 1950년 한국의 6·25전쟁 때는 사진기자가 종군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뉴스 취재망, 서비스망을 가지고 문자, 사진, 그래픽, 오디오, 비디오 등을 제공하고 있다.

 

모스크바 3상회의

1945년 12월 소련 수도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미국, 영국, 소련 3국의 외상회의(外相會議)로서 포츠담회담(1945. 5)에서 제2차 세계대전 종전 후 제반 문제 처리를 위해 설립하기로 결정되었다. 한국에서는 ‘모스크바 3상회의' 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졌고, 한국을 신탁통치(信託統治)한다고 전해져 반탁과 찬탁운동으로 커다란 파문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국 신탁통치를 결정한 것이 아니었고, 다만 이에 대하여 협의한다고 언급하였다. 이를 ‘모스크바협정’(Moskva Agreement)이라고 하며, 우리나라와 관련한 내용은 한국에 미·소공동위원회를 설치하고 일정기간의 신탁통치에 관하여 협의한다는 것과 대일정책(對日政策)의 최고결의기관으로 11개국으로 된 극동위원회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미소공동위원회 (美蘇共同委員會)

1945년 12월 모스크바삼상회의의 합의에 의하여 설치된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미 ·소 양국 대표자 회의로서 모스크바삼상회의 결정에 따라 한국의 독립정부 수립과정으로서 임시민주주의정부 수립을 원조하기 위하여 설립된 공동위원회이다. 1946년 1월 16일 덕수궁 석조전에서 한국의 신탁통치와 임시정부수립을 위한 제반문제 해결을 위하여 예비회담을 열었고 1946년 3월 20일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 결정된 조항에 따라 제1차 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미소공동위원회는 벽두부터 난관에 부닥뜨리게 되었는데 가장 큰 논란은 민주주의라는 용어와 민주주의 제정당(諸政黨)에 관한 해석을 둘러싸고 일어났다. 이때 모스크바삼상회의에서는 5년 동안의 신탁통치가 과도기 정치로서 요구되었으나 남한의 우익정당과 사회단체는 신탁통치를 반대하였다. 미국측과 소련측 대표간의 의견대립으로 1946년 5월 1일 공동성명 제7호까지 발표하였으나 아무런 결실 없이 5월 6일부터 휴회에 들어갔으며, 그 뒤 1947년 5월 21일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가 열렸으나, 7월 신탁통치 반대투쟁 단체를 둘러싼 논란으로 결국 결렬되었다. 이후 우리나라는 격동의 세월을 살게 된다.

 

유성기(留聲機)로 듣던 민족의 아픔

‘눈보라가 휘날리는 바람찬 흥남부두에 목을 놓아 불러봤다. 찾아를 봤다. 금순아 어디로 가고 길을 잃고 헤매었던가 피눈물을 흘리면서 일사이후 나홀로 왔다.’ 굳세어라 금순아‘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앞으로 앞으로 낙동강아 잘있거라. 우리는 전진한다. 원한이야 피에 맺힌 적군을 무찌르고서 꽃잎처럼 사라져간 전우야 잘자라’전우여 잘 있거라. 내가 어렸을 때, 동네에 하나밖에 없는 이장집의 축음기에서 나오는 노래를 듣기 위해 밤마다 동네 사람들이 집 안 가득 모여들곤 했다. 축음기(蓄音機)란 1877년에 미국의 에디슨이 발명한 장치로 판의 회전에 따라 바늘이 레코드에 새겨진 음구(音溝)를 지나감으로써 일어나는 진동을 기계적으로 증폭하여 소리를 내는 기계로서 유성기(留聲機)라고도 불렸다.

 

대한뉴스

새 소식을 국민에게 알리기 위해 대한민국 정부가 매주 제작한 대한뉴스는 1953년부터 1994년까지 영화관에서 상영했던 영상 보도물이다. 1945년 해방 이후에 조선시보로 시작해서 1948년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 대한전진보, 1953년 대한늬우스로 이름이 바뀌었고, 외래어 표기법 개정에 따라 대한뉴우스를 거쳐 대한뉴스로 바뀌었다. 1980년 3월 카메라 순보로 바뀌었다가 이듬해 6월부터 다시 원래의 이름으로 돌아왔다. 1994년 12월 31일 2040호를 끝으로 종영했으며, 기존 대한뉴스의 역할은 케이블 TV 채널인 국립방송(현재의 한국정책방송)으로 대체되었다. 대한뉴스에서 방송된 역사적 주요기록은 4·19혁명에서부터 5·16 군사 정변, 1·21사태, 경부고속도로 개통, 호남고속도로 개통, 영동고속도로 개통, 대통령 저격 사건(1974년 8월 15일), 광주 민주화 운동, 제10회 아시안게임, 서울올림픽,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 등이 있다.

 

국영방송공사(KBS) 개국

1961년 12월 31일 한국방송공사(KBS) 개국과 함께 본격적인 텔레비전(TV) 방송의 막이 올랐다. KBS의 효시는 일제강점기의 경성방송국이다. 8·15해방 후에는 미군정청이 방송국을 접수하여 서울중앙방송국으로 개칭했다. 1953년 8월 15일 정부는 공보처 산하 방송관리국에 서울중앙방송국을 두고 지방방송국을 통괄하는 체제를 만들어 운영했다. 한국 최초의 TV 방송은 1956년 시작되었지만, 시청범위가 매우 제한적이었고 경영 부진과 5·16군사정변이라는 정치적 상황 속에서 방송이 지속되지 못했다. 1961년 KBS가 개국한 후 1964년 동양텔레비전방송주식회사(TBC), 1966년 한국문화방송주식회사(MBC)가 차례로 문을 열면서 TV 방송이 국영방송과 민간상업방송으로 2원화되었다. 그러나 1980년 언론통폐합조치가 단행될 때 '공영' 방송체제 수립을 명분으로 TBC는 KBS에 흡수되었다. 1980년 12월 1일 KBS는 컬러 TV방송을 시작했고, 1985년에 음성다중방송을 실시했다. 1998년에는 디지털 고선명 텔레비전(High-Definition Television/HDTV) 위성실험방송을 실시했다.

 

서방7개국정상회담 (西方七個國頂上會談)

세계의 부(富)와 무역을 지배하고 있는 서방 7개 선진공업국의 연례 경제정상회담으로 선진국수뇌회의라고도 하며, 통칭 서밋(Summit)이라고 한다. 세계정세에 대한 기본인식을 같이하고, 선진공업국간의 경제정책조정을 논의하며, 자유세계 선진공업국들의 협력과 단결의 강화를 목적으로 한다. 참가국은 프랑스, 미국, 영국, 독일, 일본, 이탈리아, 캐나다이며, 그 외에 EU(유럽연합)의 의장국이 참가한다. 석유파동 이후 세계경제의 당면과제를 해결하는 방안을 모색하고자 1975년 프랑스의 랑부예에서 시작된 이 회의는 1979년 도쿄회의까지는 주로 경제문제, 특히 인플레이션, 경기(景氣), 무역, 통화, 에너지, 남북문제만 공식 논의되었다.

그러나 1980년 이탈리아의 베네치아회담부터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 항공기 납치문제, 인질문제, 난민문제 등을 주요 의제로 다루기 시작하였다. 1981년 캐나다의 오타와회의에서 발표한 10개항의 '정치성명'은 세계의 전반적인 주요 문제를 망라함으로써 정상회담으로 변질된 느낌을 주게 되었으며, 1982년 베르사유회담 역시 경제회담으로 시종일관하였으나 뚜렷한 성과없이 서로의 입장표명으로 끝났다. 1997년 이후 러시아가 참가하여 G8이 되었다.

 

APEC 정상회의 (APEC Economic Leaders' Meeting)

APEC 회원국 정상들이 해마다 11월에 한자리에 모여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비전과 그 실현 방안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비공식 회의이다. 1993년 11월 미국 시애틀에서 제1차 회의가 열린 이후 매년 열린다. 회의 결과는 공동선언문 형식으로 발표된다. 공식 명칭은 APEC 경제지도자회의, 약칭은 영문 머리글자를 딴 AELM이다. 미국의 클린턴(Bill Clinton) 대통령이 제안해, 1993년 11월 미국 시애틀에서 제1차 회의가 열렸다. 이후 1994년부터 매년 각국을 돌아가면서 열리는데, 2005년 부산 회의까지 13차에 걸쳐 회의가 열렸다.

근본 취지는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비전과 그 실현 방안에 대해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는 데 있다. 2005년 제13차 정상회의는 11월 18~19일 부산 누리마루 APEC하우스에서 ‘하나의 공동체를 향한 도전과 변화’를 주제로 열렸다. 공동 선언문인 부산선언이 발표되었는데, 여기에는 보다 자유로운 무역의 진전, 안전하고 투명한 아시아·태평양 지역을 위한 인간안보 강화, 미래를 향한 APEC의 진전 등에 관한 내용이 담겨 있다.

 

G20 참가국들의 동의를 얻어 개발 의제를 추가

영국 일간지 가디언(Guardian)은 2010년 10월 6일 인터넷 판을 통해 한국이 서울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를 통해 개발 이슈를 진지하게 다루는 데 성공한다면 G20 정상회의는 국제적인 영향력 측면에서 올림픽을 분명히 능가할 것이라고 보도하였다. 가디언은 `한국, 개발 의제를 G20 정상회의 올려' 라는 제목으로 "한국이 앞서 나가고 세계 지도자 역할을 수행해 나가는 것을 바라보는 것은 환상적이지만 놀랍지는 않다"면서 개발 의제를 G20의 핵심으로 만들려는 계획이 다른 G20 참가국들의 동의를 얻고 있다고 전하였다.

 

G20의 전환점

즉 그동안 선진국의 금융 시스템에 집중됐던 논의를 개도국과 선진국의 개발격차 해소, 빈곤 퇴치 등의 의제에 집중하면 G20의 전환점이 될 수 있다고 가디언은 분석하였다. 또한, 가디언은 한국은 선진국 반열에 최근 신속히 진입했으며 서구를 제외하면 G20 정상회의를 주최하는 첫 번째 국가라면서 무엇보다 생생한 개발 경험을 갖고 있다고 높이 평가하였으며, "개도국이 강탈당한 자산들을 복구할 수 있도록 돕는 활동과 부패한 통치자의 해외 은닉 자금을 회수하고, 도하 무역협상 과정과 별개로 저소득 국가에 대한 면세 방안 등이 G20 개발 의제 및 세부 추진 계획에 포함될 수 있다"고 설명하였다.

 

IPTV (Internet Protocol Television)

초고속 인터넷망을 이용하여 제공되는 양방향 텔레비전 서비스이다. 시청자가 자신이 편리한 시간에 보고 싶은 프로그램만 볼 수 있다는 점이 일반 케이블 방송과는 다른 점이다. 인터넷 프로토콜 텔레비전(Internet Protocol Television)의 약자이다. 초고속 인터넷을 이용하여 정보 서비스, 동영상 콘텐츠 및 방송 등을 텔레비전 수상기로 제공하는 서비스를 말한다. 인터넷과 텔레비전의 융합이라는 점에서 디지털 컨버전스의 한 유형이라고 할 수 있다. 기존의 인터넷TV와 다른 점이라면 컴퓨터 모니터 대신 텔레비전 수상기를 이용하고, 마우스 대신 리모콘을 사용한다는 점이다. IPTV는 TV 방송의 주도권이 방송사나 중계업자로부터 시청자에게 넘어가게 된다.

 

3D TV

2010 G20 서울 정상회의를 3차원 TV로 볼 수 있게 되었다. 3차원 텔레비전(3-Dimensional Television)이란 기존의 2차원 영상에 깊이(Depth)를 부가하여 시청자가 마치 시청각적 입체감을 느끼게 함으로써 생동감 및 현실감을 제공하는 새로운 개념의 텔레비전 방송이다. 3DTV 방송 기술이란 두 눈과 스테레오스코피(Stereoscopy) 기술을 적용하여 시청자가 마치 영상이 제작되고 있는 장소에 있는 것 같은 생동감 및 현실감을 느낄수 있게 하는 기술이다. 눈앞에 펼쳐진 3D영상을 잡으려고 손을 내밀거나, 전방에서 다가오는 영상을 엉겁결에 피하거나 할 만큼, 3D 영상은 종래의 2D영상과는 전혀 다른 입체감을 가지게 된다.

 

스마트 TV (Smart TV)

스마트(smart) TV란 말 그대로 `똑똑한` TV를 말한다. 그저 방송을 일방적으로 보는 것과는 다른 형식의 즐거움을 시청자에게 제공한다. 어떻게 가능할까. 바로 네트워크의 발전 덕분이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연결성`이다. 인터넷에 접속하고 내부 네트워크를 통해 웹 상의 다양한 콘텐츠를 TV로 직접 볼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각 가정에 연결된 인터넷 네트워크는 과거에 비해 훨씬 빠른 속도로 많은 데이터를 전송할 수 있게 발전했다.

스마트TV는 일반적인 영상뿐 아니라 각종 데이터, 텍스트 등을 마치 PC를 사용하는 것처럼 사용할 수 있다. 예를 들면, 올해 서울에서 열리는 서울 G20 정상회의장으로 가 보자. 한국과 독일 정상이 악수를 한다. 한국의 대통령은 누구나 알고 있지만 독일의 대통령은 어떤 분인지 잘 모를 수 있다. 이때 TV 화면 위로 검색 창을 띄운다. 그리고 독일의 대통령을 검색한다. 그러면 그 분의 이력과 출신배경 그리고 정치적 업적 등 세부 기록을 모두 검색할 수 있다. 가장 최근에 독일에서 시행하고 있는 정책과제도 영상으로 즉시 볼 수 있다. TV 한 대로 방송국에서 송출한 영상을 일방적으로 받던 것을 스마트TV는 시청자가 TV와 인터넷 정보를 주도적으로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한다.

 

스마트 TV의 미래

향후 스마트 TV는 N 스크린 시대에 메인 프레임워크가 될 것이다. N스크린이란 클라우드 컴퓨팅 기술과 스마트폰, 스마트 TV, 스마트 Pad 등의 정보기기의 N개 스크린에 공통의 서비스를 제공하는 운영체제 기술이다. 장기적으로 스마트 TV는 생활가전, IT 등 이기종 제품 간에 끊김없이(Seamless) 콘텐츠를 공유할 수 있는 하이브리드 프레임워크로 진화할 것이다. 하이브리드 프레임 워크는 서비스 제공을 위한 필요기능이 클라우드 컴퓨팅과 디바이스로 분산되는 것을 뜻한다. 그리고 스마트 TV는 스마트 홈, 라이프 케어, e 헬스 중심 디바이스로 변화될 것이 예상된다. 스마트폰에서 사용하는 각종 애플리케이션도 스마트TV를 통해 활용할 수 있다. 스마트폰이 나오면서 휴대폰뿐 아니라 다른 업종에도 변화를 불러온 것처럼 하드웨어 자체보다 콘텐츠나 서비스가 더욱 중요해지는 세상이 도래하는데 스마트TV가 그 중심이 되리라 예상한다. <끝>